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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착한 아이를 둔 부모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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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착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착하고 말 잘 듣는 것은 좋은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우며 성장한다. 착한 것과 말 잘 듣는 것은 동의어로 취급된다. 선악에 대한 이러한 가치관은 아이들의 심성에 내면화되고 윤리적 판단의 근간이 된다.

부모는 왜 착한 아이를 좋아할까?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사회생활을 잘 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 부모의 자랑이었던 모범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빛을 보지 못하곤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들이 타락해서가 아니다. 사회생활도 일도 학창시절처럼 열심히 하는 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착하고 말 잘 듣는 것은 타인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의 말에 집중하고 그에 일치하려 애쓴다. 그러면서 자기 판단을 숨기거나 유보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러므로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아이의 팔 다리를 자르는 형벌에 다름 아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불리는 수동적이며 자기 억압적인 특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갈등을 최소화하려 한다. 많이 양보하고 과도하게 사과한다. 독자적인 행동보다는 정해져있는 틀에 따르는 것을 선호한다. 겉으로는 잘 웃고 사교적이지만 내면으로는 표현되지 못한 느낌과 억압된 욕구로 인해 우울감에 시달리거나 일탈을 꿈꾼다. 

이처럼 착하다는 것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그것은 나약함의 다른 말이다.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성품이 착한 것이라면 그것이 누구에게 어울리는 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노예의 덕목이다. 당신의 아이를 노예의 삶에 어울리게 키울 것인가?

어릴 때 학교에서 보내오는 가정통신문에 자주 등장하던 평가 요소 중에 ‘온순함’이 있었다. 당시에는 착하고 온순하다면 아이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었다. 온순하다는 것은 반항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길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순종하고 말 잘 듣는 품성을 심으려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슬픈 역사의 유산 중에 하나다. 착한 아이도 그 연장선상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니체는 선한 자는 악한 자라고 말했다. 선한 자는 나약하며 나약한 인간이 사회를 나약하게 만들기에 악한 자이다. 신은 죽었다고 그 존재를 부정한 것은 신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어서이다. 인간은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전적으로 의존하도록 가르침 받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존적인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니체의 주장이 과격한 면은 있지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은 보다 존엄해져야 한다. 나이 들면서 문득 공허함을 느끼고 자신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나 되돌아보자. 무리 속에서 안주하며 나를 길들이지 않았던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외로워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나는 너무 약하고 나를 향해서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고민해야 한다. 아이에게도 이런 습성을 물려줄 것인가?

착한 사람, 선한 삶의 의미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홀로 설 수 있을 만큼의 강함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타인이 물어다 준 정답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누구의 지시에 의하지 않은 스스로의 원함대로 길을 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는 존재. 강하고 이로운 사람이 바로 착한 사람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오해를 이제는 버리자. 오히려 질문을 잘하는 아이로 키우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매력적인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부모부터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명한 질문을 할 줄 아는 아이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본 아이일 것이다.

질문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단답형의 질문과 그 다음을 품고 있는 질문이다. 단답형 질문은 노예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에 관한 궁극적 의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자신의 주변에 대해 그런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교육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이가 갖고 있는 잠재능력과 창의력을 일깨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자. 또한 아이를 어른처럼 키우자. 아이를 내 취향대로 만들지 말고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을 많이 꺼내놓도록 하자. 말을 걸고 대꾸해주며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적극적으로 반응하도록 감성을 이끌어주자. 

그렇게 키우면 비록 흙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아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또는 그 아이가 갖고 있던 참깨씨만한 가능성이 언젠가 황금으로 변해 부모에게 눈처럼 뿌려질지도 모른다. 그 아이 덕분에 부모가, 우리 사회가 대박을 맞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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