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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초인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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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시 ‘광야’의 끝 구절이다. 육사는 고난을 풀어줄 존재로써 초인을 노래했다. 과연 초인은 누구이며 언제 나타날까? 

초인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하늘을 날고 산을 움직인다. 병든 자를 일어서게 하고 수천 명을 일시에 살상할 수도 있다. 이는 초인에 관한 묘사이며 동시에 현대인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수십만 년에 걸친 호모사피언스의 평균적인 능력을 기준한다면 현대인의 능력은 인류의 범주를 뛰어넘는 경이적인 수준이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적인 대부분의 행위는 과거에는 불가능하거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 명령을 잘 따르면... 나는 제철에 비를 내려...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할 것이다... 너희는 배불리 먹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 정도의 조건이라면 요즘 세상에서는 농수산부장관에게나 어울릴 법한 공약이다. 우리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고 최신 농법과 비료로 작물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굶주림보다 과식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을 이룩했다. 

불로불사에 대한 오랜 도전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난 백 년 동안 인류의 평균수명은 두 배로 늘어났다.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40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환갑은 동네잔치를 벌일 만한 경사였다. 지금은 환갑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기대수명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우리의 능력은 이처럼 신에 가까운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늘어난 수명과 새로운 능력의 획득은 우리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행복해졌는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구한말인 1985년에는 10만 명당 약 9명의 한국인이 자살한 반면, 2012년에의 연간 자살률은 10만 명당 36명이다. 싱가포르의 국내총생산(GDP)은 코스타리카의 4배에 달하지만 삶의 만족도는 코스타리카가 훨씬 높게 나온다. 

능력의 증대가 정신의 부유함을 가져오지 않음은 명확하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지식과 물질적 소유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만족과 욕망은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간다. 그래서 행복은 늘 갈증을 겪는다. 

어쩌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사는 것이 초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정복했지만 지진이나 태풍의 기습은 여전하다. 때로는 초인의 능력 자체가 위험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초인의 발을 대신해주는 자동차는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곤 한다. 특히 초인끼리의 경쟁은 무엇보다 큰 위협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가르쳤다. 소유는 집착을 낳고 집착은 번민을 가져온다고 설파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란 편안한 삶이며, 이것은 과도한 욕망이나 격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행복의 근원을 내면에서 찾고 채움이 아닌 비움에서 구하려 한다는 점이다. 

수명 연장으로 인해 선조들보다 30~40년을 더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커다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계속 초인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호모사피언스 본연의 모습으로 즉, 자연의 일부로 남을 것인가? 

이 선택의 기로에서 중용의 길은 찾기 어렵다. 욕망은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이미 소유한 것의 사본일 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다고 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그래서 현명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초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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