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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다름과 코드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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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마광수씨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는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다. 34살 젊은 나이에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27살 때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39살에 첫 소설을 출판했다. 그가 쓴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은 주목을 받았고 거센 역풍을 맞았다. 그의 작품들은 음란 외설물로 평가절하되었고 검찰은 그를 사법처리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지나치게 엄숙하고 교훈적이며 따라서 위선적이라는 입장이었다. 건전한 사회를 지향한다면 솔직한 성 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마도 그가 교수가 아니었거나 제5공화국 시절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주장은 유별난 사람의 기행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음란물 제조혐의로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주목받는 문단의 신진이었고 명문대 교수였다. 게다가 지식인들이 독재에 저항하던 시대, 즉 문학의 교훈성이 가장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의 도발이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닐까? 그는 가혹한 비판을 받았고 매장되었다. 그렇게 그는 잊혀졌다.

그의 자살 소식은 내게 그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우울증은 끝내 지우지 못한 ‘포르노 작가’라는 주홍글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문단과 사회에서 가해진 왕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외톨이였고 지나치게 무시당했다. 왕따는 약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집단폭력이다. 가해자들은 동질감으로 연대하고 우월감으로 무장한 채 갖가지 논리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마광수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주장한다. 제자들은 그가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를 앞장서 실천했는데 사회가 이를 따돌림했다고 호소한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비판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표현의 자유가 있다. 문제의 본질은 ‘자유’가 아니다. 편가름과 왕따가 이 사태의 주범이다.

모든 폭력은 사랑의 언어로 행해지고 모든 왕따는 정의의 논리로 구성된다. 우리가 옳으니 너는 잘못되었고 잘못은 바로잡혀야 한다며 그것이 정의라고 가해자들은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매사에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모이면 저울질이 시작되고 그에 따라 패가 갈린다. 이른바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뭉치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과 편싸움이 시작된다. 싸움이 일방적이 되면 왕따는 자연스러운 귀결이 된다. 정의의 이름으로!

일상어 중에서 우리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한다. A와 B가 다르면 ‘A와 B는 틀리다’라고 말한다. 말은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행동을 만든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언어습관은 이질적인 것에 배타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풍토에서 소수자는 살아남기 어렵다. 독보적인 존재는 태어나지 못한다.

‘다름’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언어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모두 군인이 된다. 자연스레 군대문화가 사회로 이식되었다. 그래서 위계와 일사불란이 사회질서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전체가 하나됨은 바람직한 것이며 승리란 다수파가 되는 일이다. 글쓰는 문인들은 더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므로!

또한 억압과 착취의 오랜 역사 속에서 저항의식이 강화되었다. 독재에 대한 투쟁을 거치며 그것은 사회적 윤리가 되었다. 그래서 타겟이 정해지면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기준에 있다. 우리의 ‘잘못’에는 ‘틀림’과 ‘다름’이 섞여있다. 그리고 그 ‘틀림’도 지나치게 엄격하고 일방적이다. 예컨대 세월호 교감선생의 자살도 관점에 따라서는 사회적 타살로 볼 수 있다.

존 듀이는 ‘민주주의는 다양성의 조화’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는 너무 투쟁적이다. 이제는 나와 다른 것도 존중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같으면 함께 가고 다르면 놔두면 된다. 그것이 공존이다. 그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면 내 생각을 주입하는 것 또한 폭력이다. 모든 존재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고인의 시 한 구절로 헌사를 대신한다.

‘포승줄에 묶인 내 몸의 우스꽝스러움이여 / 한국에 태어난 죄로 겪어야 하는 이 희극이여’ -마광수, ‘사라의 법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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