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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유 6·25 참전유공자, “첫 전투에 출전한 180여명의 젊은 군인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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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맞이 6·25 참전유공자 인터뷰 - 강신유 지회장]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 기억해주길”


6월은 우리 민족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서려있는 ‘6·25전쟁’이 일어난 달이다. 67년의 세월이 지나 전쟁이란 단어조차 낮선 세대들로 가득한 현실을 살고 있지만 이 땅에서 일어난 비극에 마음아파하고 눈물 흘리게 되는 6월이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민간인 37만 명, 한국군 13만 여명이 사망했으며, 40만 명이 실종되는 비참한 기록을 남겼다. 

6월이 돌아오면 가슴이 아프다는 강신유(91세) ‘대한민국 6·25 참전국가 유공자회’ 지회장을 만나 그날의 기억을 들어봤다.

25살 청년이었던 강 지회장은 6·25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2년 군에 입대한다. 당시 충남에서 군에 입대하면 바로 제주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뒤 전쟁에 투입됐다. 강 지회장에게 제주도는 가슴 아픈 기억이 시작되는 장소다.

“서천에서 제주도로 와 훈련받은 180명의 젊은이들이 1차 소집이 돼서 20사단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몰살됐죠.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당시 강 지회장은 훈련소 교육을 마치고 제주도하사관학교에 들어간 뒤 강원도 양양 21사단 수색중대 분대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적진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처음 2번은 성공했지만 3번째 임무를 수행하다 적에게 포위돼 3일 만에 탈출하게 된다.

“전장에서 가슴 아픈 일이 많아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쟁 3년간 제대할 수도 없었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한명의 적군이라도 무찔러야겠다는 생각만 했죠.”

1952년 입대한 강 지회장은 10년이 지난 1962년 제대한다. 53년 강 지회장의 부모님은 전쟁에 나가 죽지 말라며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기에 그는 아내의 얼굴을 9년 만에 보게 된다.

“군에 입대 하고 나서 부모님이 살아서 돌아오라며 혼인신고를 해 놓으셨어요. 전쟁이 끝나면 바로 고향으로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7년을 더 근무해서 9년 만에 아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35살이란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렸다. 이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곧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7남매를 키워 이제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을 그토록 기다리고 60년이 가까운 삶을 함께한 아내는 이제 세상을 떠나 강 지회장은 쓸쓸하기만 하다.

“지난해 아내가 떠나 모든 생활을 혼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된 미망인들은 그 오랜 세월을 혼자서 자식을 키우며 살고 있으니 더욱 안타깝죠.”

현재 서천군에 거주하는 6·25참전유공자는 370여명으로 그 중 대다수가 복지관이나 병원에서 생활하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며, 6·25참전 명예수당은 참전유공자 본인에게만 지급돼 유족에게는 혜택이 없었다. 올해 2월 관련 조례를 일부 개정해 참전유공자 사망 시 배우자에게도 복지수당 5만원이 지급된다.

“올해 6·25기념행사에 유공자 370명 중 40명만이 참석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두들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이입니다. 몸을 다 바쳐 국가에 충성했지만 유공자에 대한 관심과 예우가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생존해있는 유공자에게 국가와 군에서 더 세심한 대우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고령의 유공자인 강 지회장은 “전쟁이 무엇인지, 6·25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며 “지금보다 더 나라를 생각하고 수많은 희생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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