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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살아서 잊혀진 자 죽어서 기억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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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못할 짓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차마 죽지 못해 안할 짓도 없는 그 중심에 어려서 동문수학했던 두 사내가 있다.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죽자 세종 23년1441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 단종 이홍위李弘暐가 보위에 오르는데 그는 태어 난지 3일 만에 자모慈母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1452년 12세에 아버지 문종마저 떠나보내고 제위2년 남짓 삼촌 수양대군에게 폐위되고 1455년 15세에 상왕이 되고 1457년 6월 세조3년 17세에 이르러 노산군으로 강등 후 영월로 유폐되고 그해 10월에 서인으로 재차 강등되어 사사된 어린 소년군주 조선6대왕 단종.

이때 사약을 들고 간 사내는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유배 길을 호송했던 왕방연王邦衍이다.

그의 시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로 시작되는 단장곡斷腸曲일수一首는 절창이 되어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판다.

유교적 명분을 송두리 채 흔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사건은 당시 삼각산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준비하던 21세의 열혈남아 법명을 설잠雪岑 청간공淸簡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36세의 문충공文忠公서거정徐居正으로 하여금 명분名分과 명리名利로 갈라서게 했다.

김시습의 이름은 논어 학이편 첫 문장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 되라는 의미로 그의 조부가 시습時習이라 지었고 삼불후三不朽 강중剛中 서거정徐居正은 춘추春秋의 해설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제1편 은공3년 경經. 동冬.십이월十二月제후齊候정백맹우석문鄭伯盟于石門<겨울. 12월 제나라 희공과 정나라 장공이 석문에서 맹약을 맺었다.>에 대한 전傳.군자대거정君子大居正에서 거정居正을 취해서 항상 정도를 걸으라는 의미로그의 조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를 위해 벌써부터 지어놨다던 이름이다.

서거정은 이색의 손자 홍문관 수찬 이계전李季甸1404-1459에게 배우는데 이때 사서四書인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운 동문이 15세 아래 매월당 김시습이다. 당시 매월당 나이는 5세다. 13세에 이르러 대사성 김반金泮과 사성 윤상尹祥에게 삼경三經을 배운다.

이계전李季甸은 이종선李種善의 아들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종선의 父다.

이계전의 모친은 권근權近의 여식女息 안동 권씨다. 

그들 이름에 곡穀 색穡 종種을 쓴 것은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곡은 심는다는 뜻이고 그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색은 심은 것을 거둔다는 뜻이고 3대에 이르러 손자 종덕種德 종학種學 종선種善의 종은 씨를 뿌린다는 뜻이다.

종덕은 자녀 넷을 뒀는데 4자인 맹진孟畛의 후손인 이홍조李弘祚의 현손이 퇴계의 적통을 이은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이고 대산의 모친이 갈암 이현일의 손녀이며 밀암密庵이재李栽의 여식이다.

갈암葛菴이현일李玄逸은 소설가 이문열의 선조다.

이색의 3자 종선의 셋째 아들이 이계전李季甸이고 종선의 장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 사육신 이개李塏다.

이계전과 이개는 숙질叔姪간으로 이계전은 세조를 도와 일등 공신이 되어 명리名利의 삶을 살았고 조카 이개는 사육신으로 집안이 쑥밭이 되는 명분의 길을 선택 했다.

이계전의 현손이 이색의 7세손 토정 이지함이다.

토정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토정의 형 성암省菴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이 선조 때 대북파 영수 아계鵝溪이산해李山海이며 오성과 한흠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다.

각설하고 서거정은 수양대군의 후광을 얻어 문형文衡<대제학>으로 장장30년 가까이 조선의 문병文柄을 장악한다. 

반면 조선제일의 천재 김시습은 광인狂人이 되어 사육신이 저자거리에서 목이 잘렸을 때 밤중에 몰래 수급을 훔쳐 한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묻어주는 비분강개의 삶을 산다.

명분과 명리의 삶. 이들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어렵다. 

성종실록1488년 성종19년 12월 24일 癸丑일의 기록만이 그 삶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이 없고 또 일찍이 후학을 장려해 기르지 않으니 세상은 이로써 작게 여겼다. 

거정居正기협器狹무용인지량無容人之量우又미상장진후생未嘗?進後生세이차소지世以此少之<조선왕조실록영인본11권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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